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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으로 바위 치기라고 했나요?
울산에서 자란 내가 다시 만난 1981년 부산의 기억
어릴 적, 아버지 손을 잡고 울산 성남동 시장통을 지나 시외버스를 타고 부산 남포동에 가곤 했습니다. 자갈치 시장의 비릿한 바다 냄새와 뜨겁게 김이 서린 돼지국밥집 유리창 너머로 보이던 투박한 사투리들... 영화 〈변호인〉을 보는데 자꾸만 그때 그 1981년의 공기가 코끝을 스치더라고요. 사실 어릴 땐 몰랐습니다. 평범한 아저씨들이 먹던 그 뜨거운 국밥 한 그릇이, 누군가에겐 목숨을 건 약속의 장소였고 또 누군가에겐 짓밟힌 진실을 붙잡는 마지막 보루였다는 것을요.
영화는 1980년대 초반 부산, 고졸 출신의 돈 없고 빽 없는 세무 변호사 송우석(송강호)의 이야기로 문을 엽니다. 그는 부동산 등기며 세금 자문으로 돈을 긁어모으며 공부해서 남 주나, 돈 벌어야지 라고 외치던 지극히 세속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단골 국밥집 아들 진우(임시완)가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려 고문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주하면서, 인생의 항로를 완전히 바꿉니다. 안녕들 하십니까 라는 말조차 사치였던 시대, 한 남자가 가시밭길인 변호인의 길을 택하는 과정은 지독하리만큼 뜨겁고 아픕니다.
바위는 죽은 것이고, 계란은 살아있다
영화를 보며 가장 가슴이 먹먹했던 장면은 송 변호사가 법정에서 절규하며 국가란 국민입니다! 라고 외칠 때였습니다. 어릴 적 제가 보았던 어른들의 세상은 늘 조용하고 무거웠습니다. 뉴스에선 늘 좋은 소식만 나왔지만, 가끔 집안 어른들이 쉬쉬하며 나누던 이야기 속에선 서늘한 무언가를 어린나이에도 느껴졌었으니까요.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누리는 이 공기가 사실은 영화 속 인물들처럼 자신의 안락함을 포기한 이들의 처절한 숨결로 만들어진 것이었음을, 나이가 든 이제야 깨닫습니다.
특히 고문 장면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괴로웠습니다. 1981년, 부산 어느 지하실에서 비명이 메아리칠 때... 그때 울산에서 뛰놀던 어린 저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이 괜히 미안해지더군요. 영화 속 차동영 경감(곽도원)이 애국 을 핑계로 폭력을 정당화할 때의 그 확신에 찬 눈빛은, 집단 광기가 개인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보여주는 소름 끼치는 대목이었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의 굽은 등이 이제야 보입니다
송 변호사가 집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보며 고민하던 장면 기억나세요? 그 장면 보는데 자꾸 우리 엄마, 아빠 얼굴이 겹쳐서 미치겠더라고요. 81년 그 시절, 부모님은 딱 지금 제 나이였겠더군요. 자식 새끼 고생 안 시키려고, 행여 어디 가서 매 맞고 다닐까 봐 입을 꾹 다물고 일터로만 향하셨을 당신들... 그땐 당연한 줄 알았던 그 침묵이 사실은 얼마나 무거운 희생이었는지 이제야 빚처럼 느껴집니다.
나이가 들어 누군가의 선배가 되고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에 서보니 자꾸 저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나는 과연 송우석처럼 바위는 죽은 것이고 계란은 살아있다 는 그 무모한 진리를 내 아이에게 가르칠 용기가 있나? 아니면 그저 튀지 마라, 적당히 살아라 라며 아이의 날개를 미리 꺾고 있지는 않은가? 영화 속 송우석이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법정으로 향하던 그 발걸음이, 비겁하게 살지 말라는 매서운 회초리가 되어 제 가슴을 때립니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보다, 내 양심이라는 일기장에 얼마나 정직한 마침표를 찍고 있는지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요.
국밥 한 그릇의 무게를 몰랐던 어린 날의 미안함
영화 속 양우석 감독이 재현해낸 81년의 부산은 너무나 생생해서 오히려 아팠습니다. 영도대교 근처의 시끌벅적한 소음들, 낡은 타일이 붙은 국밥집의 풍경... 울산에서 자란 저에게 그곳은 늘 맛있는 거 먹으러 가는 나들이 장소 였거든요. 그때 그 시절, 시장통에서 제가 천진난만하게 국밥 국물을 들이켜고 있을 때,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지하실에선 누군가 평범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철없던 어린 시절엔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배우 송강호의 땀방울과 핏대는 단순한 연기가 아니라, 그 미안함을 대신 쏟아내는 시대의 통곡처럼 들렸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산의 모든 변호사가 송우석의 이름을 연호하며 법정에 출석하는 장면은 저에게 다정한 답신 같으면서도 매서운 질문 같았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국밥 한 그릇에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느냐 고 묻는 것 같았거든요. 이 영화는 단순히 80년대를 추억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범한 국밥 한 그릇의 온기가 누군가의 처절한 사투로 지켜낸 결과물임을 뒤늦게 깨닫게 하는, 뼈아픈 반성문입니다.
나의 인생 평점: ★★★★★ (5.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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