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의 안개보다 서늘했던 침묵,
내 아이의 등굣길이 걱정되어 다시 꺼내본 영화 '도가니'
비가 내리기 직전, 공기가 눅눅하게 피부를 감쌀 때면 저는 습관적으로 아이를 살피게 됩니다. 영화 〈도가니〉를 처음 보았던 날, 제 코끝을 찔렀던 건 낡은 학교 복도의 습한 콘크리트 냄새와 그 속에 갇혀 있던 아이들의 소리 없는 비명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누군가를 지켜줘야 할 부모가 되어 다시 본 이 영화는, 억지로 외면해왔던 우리 사회의 비릿한 구석을 기어이 직시하게 만들었습니다.
영화는 자욱한 안개로 둘러싸인 도시 무진의 청각장애인 학교 '자애학원'에 미술 교사 인호(공유)가 부임하며 시작됩니다. 인호가 처음 학교 문을 열었을 때 마주한 것은 환대가 아니었습니다. 칠판을 긁는 듯한 기분 나쁜 정적, 그리고 화장실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타격음이었죠. 공지영 작가의 원작을 바탕으로 황동혁 감독이 빚어낸 이 세계는, 지옥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인자해 보이는 얼굴 뒤에 똬리를 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인호와 인권운동가 유진(정유미)이 아이들에게 가해진 끔찍한 학대의 실체를 파헤치며 절정에 달합니다. 하지만 관객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가해자의 잔혹함 자체가 아닙니다. 법정에서 가해자들이 내뱉는 뻔뻔한 대사, 그리고 종교적 권위와 교육계의 인맥, 전관예우라는 법조계의 보이지 않는 장벽이 서로 단단하게 결탁하여 거대한 성벽을 쌓는 풍경입니다. 경찰은 귀를 닫고, 법은 증거보다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먼저 살핍니다. 어른들의 비겁한 변명이 아이들의 간절한 수화보다 더 힘 있게 전달되는 비정한 현실 앞에, 부모인 저는 숨이 턱 막히는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교장실 소파의 푹신한 가죽 질감과 범죄 현장의 차가운 타일 바닥이 대비되던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직함이라는 이름의 자리에 앉아 아이들의 영혼을 난도질하던 이들... 영화는 가해자의 악마성보다 침묵으로 그 악을 방조하는 시스템의 공범 의식을 날카로운 메스로 헤집어 놓는 것 같았습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우리를 바꾸지 못하게 하기 위해 싸우는 것 이라는 대사는, 나이가 들면서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것이 익숙해진 제 가슴을 아프게 후벼 팠습니다. 그건 거창한 승리 선언이 아니라, 적어도 내 아이 앞에서는 비겁한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읽혔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등굣길, 제 눈은 집요하게 아이의 살피게 됩니다.
어제 아침, 현관문을 나서는 아이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습니다. 어릴 적 울산 성남동 시장통을 지나며 보았던 평화로운 풍경들이, 이제는 '혹시나' 하는 불안함으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영화 속 '연두'나 '민수'가 짊어졌어야 했던 가방 안에는 책이 아니라 어른들의 추악한 비밀이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계단처럼 차곡차곡 발전하고 있다고 믿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도가니〉는 그 계단 밑 어두운 구석에서 여전히 누군가가 떨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서늘하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세상의 눈치에 익숙해진 제 모습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저는 과연 내 아이가, 혹은 이름 모를 이웃의 아이가 상처받을 때 그건 잘못됐다"고 소리칠 용기가 남아 있을까요? 영화 속 인호가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며 망설이던 모습은 바로 저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가르쳐 줍니다. 어떤 안개 속에서도 내 아이의 눈동자 속에 담긴 진실을 놓치지 않는 정직한 시선만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는 것을요.
인간은 결국 혼자이지만, 누군가의 듣는 귀 가 되어줄 때 비로소 짐승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훗날 제 아이가 그때 어른들은 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라고 물을 때, 적어도 비겁한 침묵의 편에 서지 않았노라고 당당하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영화의 엔딩, 법원 앞 물대포 세례 속에서도 젖은 눈으로 끝까지 전광판을 응시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무심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부모들의 마지막 자존심처럼 느껴져 가슴이 아릿했습니다.
스크린 속 공유의 얼굴이 이토록 낯설게 느껴졌던 적이 있었나 싶습니다. 늘 매끈한 주인공으로만 기억되던 그가, 아이들의 고통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져 내리는 평범한 '인호'가 되었을 때 저는 비로소 이 비극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복도 한복판에 주저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던 그 뒷모습은, 잘 짜인 연기를 넘어 자책과 미안함으로 가득 찬 한 인간의 처절한 고백처럼 느껴져 제 가슴 한구석도 같이 무너졌습니다. 정유미 배우의 흔들림 없는 시선 또한 자칫 절망으로만 끝날 수 있었던 이 비릿한 현실 속에 마지막까지 '사람의 온기'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해주었습니다.
돈과 신념이라는 거창한 명분이 어떻게 아이들의 작고 여린 몸을 짓밟는 무기가 될 수 있는지, 영화는 지독하리만큼 정직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화 개봉 이후 '도가니법'이 제정되는 등 사회적 파동을 일으킨 것은, 이 작품의 진정성이 스크린이라는 벽을 뚫고 현실의 잠든 양심을 깨웠기 때문입니다. 안개는 걷혔을지 모르지만, 그날의 비명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틈새를 흐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인생 평점: ★★★★★ (5.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