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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사랑 교회 오빠가 목사님이 되기까지... 98학번의 찡한 첫사랑과 영화 '건축학개론'

    "너, 목사 사모님 할 수 있어?"
    98학번의 찡한 첫사랑과 영화 건축학개론

    얼마 전 운전하다 라디오에서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 흘러나오는데, 그 첫 피아노 반주가 귀에 닿자마자 가슴이 찡~ 하더라고요. 🎹 98학번이었던 대학 새내기 시절, 우리 모두 김동률의 그 깊은 목소리에 취해 누구나 한 번쯤은 '전생에 대단한 사랑을 했던 비운의 주인공'인 척했었잖아요. 저에게 영화 〈건축학개론〉은 아련한 추억이라기보다, 맞아, 저때 나도 저렇게 바보 같았지! 하며 혼자 피식 웃게 되는 흑역사 자서전 같은 영화입니다.
    영화는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만난 스무 살의 승민(이제훈)과 서연(수지)이 15년 뒤에 다시 만나 함께 집을 지어가는 이야기입니다. 포스터에는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감성적인 문구가 적혀 있지만, 제 생각엔 이 영화의 진짜 미덕은 스무 살 그 시절의 서툴고, 찌질하고, 말 한마디 못 해서 가슴앓이하던 우리들의 촌스러운 진심을 분석하는 데 있습니다. CD 플레이어가 튈까 봐 가방을 품에 꼭 안고 조심조심 걷던 그 정성...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뚝딱거리던 우리들의 모습이 영화 내내 겹쳐 보입니다.

    CD 플레이어보다 뜨거웠던 교회 오빠의 기억

    영화를 보면서 수지를 바라보는 이제훈의 어수룩한 눈빛을 보는데, 문득 고등학교 시절 제가 정말 좋아했던 교회 오빠가 떠올랐습니다. ㅋㅋㅋ 사실 제가 그때 교회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다녔던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찬양 인도하는 그 오빠 얼굴 한 번 더 보려는 흑심이었거든요. 오빠 뒷모습만 봐도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던 열일곱의 나. 하지만 그때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 붙여보고 졸업을 했었죠.
    영화 속 승민과 서연처럼, 저도 대학생이 되어 그 오빠와 거짓말처럼 재회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오빠는 여전히 멋있었고, 놀랍게도 저에게 청혼 까지 하더라고요! 정말 심장이 터질 것 같았죠. 그런데 그 로맨틱한 순간에 오빠가 던진 한마디가 제 인생의 항로를 바꿔놓았습니다. 나 신학대학 갔어. 나중에 목사가 되는 게 꿈인데... 너, 목사 사모님으로 살 수 있어?

    나의 엔딩은 사모님 이 아니었습니다

    그 진지한 질문을 듣는 순간, 제 머릿속엔 기억의 습작 의 서정적인 멜로디가 아니라 현실의 비상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ㅋㅋㅋ 사모님이라니...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더라고요. 결국 저는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슬그머니 연락을 끊고 말았습니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승민이가 작은 오해 때문에 서연을 멀리했던 것처럼, 저도 자신감 부족 이라는 아주 현실적인 이유로 제 첫사랑을 종결시켰던 셈입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울산 친정에 내려갔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예전 그 교회를 한 번 찾아가 봤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주보를 보니까 그 오빠 이름이 딱 적혀 있더라고요. 정말로 그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 되어 계셨습니다! ⛪ 강대상에서 점잖게 설교하시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데, 묘하게 웃음이 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찡해지더군요. 아,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인생이라는 집을 잘 지으며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납뜩이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

    이 영화의 구원자는 누가 뭐래도 '납뜩이(조정석)'입니다. "키스란 말이야..."라며 열변을 토하던 그 모습은, 우리 주변에 꼭 한 명씩 있던 '자칭 연애 박사' 친구들의 판박이였죠. 납뜩이의 찰진 연기 덕분에 이 영화는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첫사랑 이야기를 배꼽 잡는 코미디와 눈물 쏙 빼는 성장담 사이로 완벽하게 이끌고 갑니다. 98년 그 시절, 모뎀 접속음 들으며 전람회 가사 받아 적던 우리 모두에게 납뜩이는 "야, 쫄지 마!"라고 외쳐주는 든든한 친구였습니다.
    이용주 감독의 연출은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었습니다. 낡은 한옥 집이 아름답게 변해가는 과정은, 상처 입은 우리의 기억이 치유되는 과정과 닮아 있습니다. 추억은 결국 우리가 오늘을 견디게 하는 가장 강력한 비타민이라는 걸 이 영화는 건축이라는 멋진 비유로 풀어냈습니다. 아, 진짜 다시 봐도 엔딩에서 노래가 나올 때는 항복입니다. 그 시절 그 오빠, 아니 목사님도 가끔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나오면 저처럼 가슴이 찡해질까요? ㅋㅋㅋ
    나의 흑역사 평점: ★★★★★ (5.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