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코미디였다. 조커의 광기 뒤에서 우리 엄마의 슬픈 미소를 보았다 (영화 조커 리뷰)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코미디였다.
    조커의 광기 뒤에서 우리 엄마의 슬픈 미소를 보았다

    지하철을 타고 퇴근하던 길이었습니다. 건너편에 앉아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한 남자를 보며 사람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를 옮기더군요. 그 남자의 눈을 우연히 마주쳤을 때, 저는 공포보다 지독한 슬픔을 읽었습니다. '저 사람도 누군가에겐 소중한 아들이었을 텐데, 왜 세상은 저를 투명인간 취급할까?' 그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 무렵, 저는 영화 〈조커〉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화려한 히어로물 뒤에 숨겨진 한 남자의 처절한 몰락... '빽'도 없고 희망도 없는 우리 시대의 아서 플렉들이 던지는 비명을 깊이 있게 다시 읽어보려 합니다.
    영화 〈조커〉는 우리가 익히 알던 배트맨의 숙적, 그 화려한 악당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고담시라는 지옥 같은 도시에서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광대 일을 하며 살아가는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의 일상을 아주 건조하고 집요하게 비춥니다. 그는 뇌 손상으로 인해 슬프거나 화가 날 때 오히려 웃음이 터져 나오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가 울음 같은 웃음을 터뜨릴 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세상의 따뜻한 시선이 아니라, 차가운 발길질과 조롱뿐입니다.
    줄거리는 아서가 믿어왔던 모든 세계가 붕괴하면서 폭발합니다. 유일한 안식처였던 어머니의 과거가 거짓이었음을 깨닫고, 사회 복지 예산 삭감으로 인해 정신과 상담과 약물 치료마저 끊기게 된 순간, 아서의 내면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그는 더 이상 '착한 아들'로 남기를 포기합니다. 대신, 자신을 비웃던 세상을 향해 가장 잔혹하고도 화려한 코미디를 선보이기로 결심하죠. 줄거리는 결국 아서가 아서로 죽고 '조커'로 부활하는 과정을 그리며, 관객에게 과연 누가 그를 괴물로 만들었는가라는 뼈아픈 질문을 던집니다.

    "무례함이 예의가 된 세상", 시스템이 낳은 악마

    제가 이 영화를 보며 가장 큰 분노를 느꼈던 지점은 사회적 안전망이 사라진 자리에서 개인이 어떻게 말살되는가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아서가 상담사에게 "내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군요"라고 말할 때, 그것은 비단 영화 속 대사만은 아니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데이터와 효율성만을 따지는 시스템은 가난하고 병든 자들의 목소리를 '노이즈'로 취급합니다. 상담사는 건성으로 질문을 던지고, 고용주는 그의 속사정보다는 광대 분장이 지워졌는지만을 체크합니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70년대 마틴 스코세이지 스타일의 현실주의를 빌려와, 자본주의가 극에 달한 고담시의 추악함을 적나라하게 분석했습니다. 상위 1%의 부자인 토마스 웨인이 가난한 시민들을 '광대'라고 비하할 때, 그 오만한 시선이 결국 어떤 재앙을 불러오는지 영화는 시각적으로 증명합니다.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무관심과 무례함이 쌓여 한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보는 과정은 액션 영화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고 소름 끼치는 공포로 다가왔습니다.
    특히 계단이라는 공간의 활용은 압권입니다. 영화 초반, 아서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헐떡이며 올라가던 가파른 계단은 그가 견뎌야 했던 '선량한 삶'의 무게였습니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 조커 분장을 하고 춤을 추며 내려오던 그 화려한 계단 장면은 역설적이게도 추락이 곧 해방이 되는 비극적인 카타르시스를 선사합니다. 세상을 향한 예의를 집어던진 순간 비로소 자유로워진 그의 모습은, 규칙을 지키며 살아가다 지친 우리 모두에게 묘한 해방감과 동시에 지독한 씁쓸함을 안겨주었습니다.

    어머니의 슬픈 미소, 그리고 내가 짊어진 삶의 무게

    영화 속 아서가 병든 어머니 페니 플렉을 씻기고 밥을 먹이는 장면들을 보며 저는 자꾸만 나의 부모님이 겹쳐 보여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자식인 나를 키우기 위해 온갖 수모를 견디며 사셨을 부모님의 세월이, 이제는 기력이 쇠하여 자식의 손길을 기다리는 뒷모습으로 변해버린 현실이 너무나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아서가 "해피"라는 별명에 갇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을 강요받았듯이, 우리 부모님 역시 자식 앞에서 고통을 숨기고 '괜찮다'는 슬픈 미소를 지어오셨던 것은 아닐까요?

    79년생인 저에게 이 영화는 단순한 빌런 영화가 아닙니다. 얼마 남지 않은 제 청춘의 시간 동안, 제가 지켜야 할 것은 대단한 성공이 아니라 나와 부모님이 세상으로부터 지워지지 않게 버티는 것 그 자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잉여'나 '패배자'라고 조작할지라도, 끝까지 인간으로서의 온기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던 아서의 초반 모습은 제 자신의 부끄러운 자화상이기도 했습니다.

    아서가 결국 어머니를 제 손으로 떠나보내며 눈물 흘리는 장면에서, 저는 한 인간이 마지막 끈이었던 '사랑'을 놓아버릴 때 얼마나 무서운 존재가 되는지 성찰했습니다. 훗날 제 아이에게 "세상이 너를 외면할지라도, 누군가는 반드시 너의 목소리를 듣고 있단다"라고 당당하게 말해줄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간절한 기도를 해봅니다. 조커의 광기가 무서웠던 이유는, 그 광기가 누군가의 관심 한 조각만 있었어도 막을 수 있었던 외로움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호아킨 피닉스, 연기가 아닌 영혼의 발작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그야말로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뼈만 남은 앙상한 등 근육과 기괴하게 뒤틀린 몸짓은 아서 플렉이 겪는 심리적 고통을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구현해냈습니다. 특히 그가 거울 앞에서 광대 분장을 하며 눈물을 흘리는 동시에 웃음을 짓는 첫 장면은 관객의 숨통을 단숨에 조여옵니다. 그의 눈빛에는 억눌린 분노와 타인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간절함이 공존했으며, 그 복잡한 감정선이 조커라는 전설적인 악당에게 개연성을 부여했습니다.
    로버트 드 니로의 가세 또한 훌륭했습니다. 한때는 아서의 우상이었으나 결국 그를 공개적으로 망신 주는 머레이 프랭클린은, 미디어가 타인의 비극을 어떻게 오락으로 소비하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힐뒤르 구드나도티르의 첼로 사운드트랙은 영화 내내 낮게 깔리며 아서의 붕괴되는 정신세계를 청각적으로 지배했습니다. 이 영화는 화려한 특수효과 없이도, 오직 배우의 숨소리와 음악만으로 이토록 거대한 서사적 압박감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마스터피스입니다.
    결국 〈조커〉는 우리 사회의 가장 어두운 구석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정신 질환에 대한 편견, 계급 간의 단절, 그리고 미디어의 폭력성이라는 주제를 코믹스 영화의 틀 안에서 이토록 품격 있게 담아낸 작품은 앞으로도 보기 힘들 것입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자리를 뜰 수 없었던 이유는, 화면 속 고담시가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서울의 어느 골목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영화를 보고 마음 깊이 남았던 질문들

    1. 왜 제목이 '아서'가 아닌 '조커'인가요?

    세상은 아서라는 이름의 평범한 인간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광기 어린 조커가 되었을 때 비로소 사람들은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죠. 이는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극단적인 방식을 선택해야만 하는 소외된 이들의 비극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2. 영화 속 '웃음병'은 실제로 존재하는 질환인가요?

    네, '병적 웃음과 울음(PBA)'이라는 신경계 질환과 유사합니다. 영화는 이 병을 단순히 설정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내면의 슬픔과 외면의 표현이 불일치하는 현대인의 페르소나를 상징하는 강력한 장치로 활용했습니다.

    3. 영화의 모든 내용이 아서의 망상일 가능성이 있나요?

    감독은 이를 열린 결말로 남겨두었습니다. 상담실에서 시작하고 끝나는 영화의 구조는, 영화 전체가 아서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조작된 시나리오'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하지만 그 망상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왜 그런 망상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사회적 책임입니다.

    4. 토마스 웨인은 정말 아서의 아버지였을까요?

    영화 속 서류상으로는 페니 플렉의 망상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권력자들이 자신의 치부를 덮기 위해 서류를 조작했을 가능성도 열려 있습니다. 이 불확실성 자체가 진실마저 조작될 수 있는 기득권 사회에 대한 비판적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5. 이 영화가 주는 궁극적인 위로는 무엇인가요?

    역설적이게도 "너만 외로운 게 아니야"라는 처절한 공감입니다. 조커의 탄생 과정을 지켜보며 우리가 느낀 불편함은, 사실 우리 주변의 '아서'들을 외면해온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었습니다. 그 가책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타인에 대한 친절이라는 '해답'에 가까워집니다.

    나의 최종 평점: ★★★★★ (5.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