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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삐삐가 울리면 동전을 움켜쥐고 공중전화를 찾아 뛰어가던 시절. PC통신 채팅방에서 "나이/성별/지역" 세 글자가 모든 대화의 시작이던 시절. 길거리 떡볶이를 500원에 사 먹었고, 학교 앞 문방구에서 뽑기를 하면 당첨이든 꽝이든 그게 하루의 가장 큰 이벤트였던 그 시절..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2020, 이종필 감독)을 보면서, 제가 기억하는 90년대의 고딩 시절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스크린에서 나오는 건 영화인데, 느껴지는 건 제 고등학교 시절의 따뜻함, 까르르 웃던 행복함들 이었어요.
영화 속 1995년의 풍경
이 영화는 대기업 삼진그룹에서 일하는 고졸 여직원 세 명의 이야기입니다. 이자영(고아성), 정유나(이솜), 심보람(박혜수). 이 세 사람은 대졸 사원과 같은 회사에서 일하지만 하는 일과 대우가 완전히 다릅니다. 승진을 하려면 토익 600점이 필요해서, 업무가 끝나면 회사에서 운영하는 영어반에 다닙니다.
영화 속 사무실 풍경을 보면 그 시절이 살아납니다. 두꺼운 브라운관 모니터,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더미, 쉬지 않고 종이를 뱉어내는 팩스 기계. "여직원은 커피 좀 타와", "고졸은 고졸답게 해"라는 대사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분위기. 지금이라면 녹취해서 바로 신고할 수 있는 말들인데, 1995년에는 그게 일상이었습니다. 어의없게 웃기면서도 씁쓸한 장면들이에요.
우연히 발견한 진실, 그리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상황
세 사람은 우연히 회사가 공장 폐수를 불법 방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강 하류 마을 사람들이 피부병에 시달리고 있고,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하고 있어요. 이걸 알게 된 자영은 회사에 보고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가 현실의 벽입니다. 상사에게 말하면 "네가 뭘 안다고" 하며 무시당합니다. 증거를 가져가도 "고졸이 회사 일에 끼어들지 마"라는 소리를 듣고요. 심지어 인사 불이익까지 받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벌을 받는 구조. 이건 90년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도 내부 고발자들이 겪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세 사람이 대단한 진짜 이유
자영, 유나, 보람이 대단한 건 단순히 환경 문제를 고발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고졸이라서, 여자라서, 회사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누구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게 핵심이에요.
2025년이라면 SNS에 올리거나, 시민 단체에 연락하거나, 유튜브에 제보할 수 있겠죠. 하지만 1995년에는 그런 통로가 없었습니다. 자기 몸 하나로, 자기 발로 직접 부딪혀야 했어요. 환경부에 찾아가고, 기자를 만나러 다니고,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공장 근처를 돌아다니는 이 세 사람의 모습이, 그래서 더 존경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무엇보다 세 사람이 서로를 의지하는 장면들이 좋았습니다. 한 사람이 지치면 다른 두 사람이 끌어주고, 겁이 나면 같이 무서워하면서도 "그래도 해보자"고 서로를 북돋아요. 거창한 영웅담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작은 용기. 이게 이 영화의 가장 빛나는 부분입니다.
그 시절 우리가 잃어버린 것과 얻은 것
이 영화를 보면서 두 가지 감정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그때는 참 불합리한 세상이었구나"라는 감정이 들었습니다. 성별과 학력으로 사람을 나누는 게 당연하던 시절이 이제는 적어도 "당연하지 않다"는 인식이 생겼으니까요. 법도 제도도 그때보다는 나아졌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때 있던 끈끈함과 뜨거움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라는 아쉬움이에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직선적인 분노, 모르는 사이라도 어려우면 도와주는 동네 아웃의 정, 완벽하지 않아도 일단 부딪혀보는 무모한 용기. 효율과 개인주의가 지배하는 지금, 그때의 그 에너지가 그리워지는 건 제가 나이를 먹어서일까 싶어요.
90년대를 기억하시는 분이라면 추억에 젖을 수 있고, 90년대를 모르시는 분이라면 그 시절의 공기를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영화입니다. 어느 쪽이든 고아성, 이솜, 박혜수 세 배우의 케미가 좋아서 가볍게 즐기시기에도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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