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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혜성 앞에서 무너지는 인간들: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을 때의 불안

    돈 룩 업을 처음 본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화면에선 거대한 혜성이 날아오고 있었지만, 영화 속 사람들은 누구 하나 제대로 반응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장난처럼 여겼고, 누군가는 경제적 기회라고 떠들어댔다. 놀랍게도 나는 그 장면에서 영화적 과장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그대로 비춰지는 느낌을 받았다. 진실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사람들은 마치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외면하고 있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디비아스키가 혜성을 발견하고, 민디 박사가 계산을 통해 지구 충돌 확률을 확인하는 순간, 그들이 느꼈을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세상을 바꿀 만큼 커다란 사실을 손에 쥐고 있지만, 그걸 세상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느끼는 무력감. 내가 현실에서 어떤 중요한 사실을 말하려 할 때마다 돌아오는 반응과도 닮아 있었다. 진지하게 말하면 가볍게 농담으로 흘려버리거나, 듣기 싫다고 대화를 끊어버리던 사람들. 그때마다 나는 말문이 막혔고, 결국 조용히 입을 다물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이 영화는 혜성이라는 거대한 공포를 앞세우지만, 사실 혜성은 주제가 아니다.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이 있다. 인간이 진실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리고 공포와 불확실성을 어떻게 회피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대통령과 고위층은 사실을 인정하면 정치적으로 손해가 될까 봐 모른 척하고, 미디어는 충격적인 사실 대신 자극적인 뉴스각을 찾는데만 바쁘고, 대중은 진실보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마치 지구를 향해 떨어지는 혜성보다, 사람들이 보여주는 무심함이 더 파괴적이었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게 됐다. 왜 사람들은 현실을 외면할까. 왜 불편한 진실을 들려주는 사람은 항상 과민한 사람 취급을 받아야 할까. 그리고 왜 이렇게 손쉽게 위험 신호를 흘려보내는 것일까. 영화 속 장면들은 지금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수많은 이슈들과 맞닿아 있었고, 나 자신도 그 가운데 서 있었다. 뉴스에서 기후 위기를 다뤄도 "지금 바쁜데, 나중에 생각하자"라고 넘겨버린 적이 있었고, 건강 이상 신호를 무시하며 "설마 큰 문제겠어"라고 스스로를 속였던 적도 있었다. 나 역시 혜성을 외면하던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디비아스키가 처음 TV 쇼에 나가서 울분을 터뜨릴 때, 나는 그 감정이 과장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급하게 호흡이 올라오고, 말은 빨라지고, 눈빛은 점점 흔들리는 그 모습. 나는 그 장면에서 그녀의 분노보다, 그녀의 절박함이 먼저 읽혔다. 누군가에게 믿어달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상황. 그 답답함이 가슴에 턱 하고 걸렸다. 영화적 연출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에서 이미 수백 번 경험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장 무서운 건, 사람들이 혜성이 떨어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일상으로 복귀해 버린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쇼핑을 하고, 누군가는 SNS에서 밈을 만들고, 누군가는 혜성 관련 굿즈를 사고팔며 이 상황조차 소비해 버린다. 이것은 분명 블랙 코미디인데, 웃음 뒤에 밀려오는 감정은 공포와 허탈함뿐이었다. 우리의 시대는 심각한 문제일수록 더 빠르게 농담이 되고, 대중에게는 그저 또 하나의 콘텐츠가 된다.

    나는 그 모습에서 끔찍할 만큼 익숙한 현실을 보았다. 사고가 터지면 사람들은 추모보다 먼저 사진을 찍고, 뉴스는 사실보다 조회수를 우선하고, 정치권은 사태를 이용할 방법부터 찾는다. 혜성이 눈앞에 있어도, 인간은 자신만의 리듬으로 살아가고 자신의 이해관계에 맞게 정보를 재단한다. 그 속에서 민디 박사와 디비아스키는 자신들이 과학자가 아니라, 버티기 어려운 세상 속에서 조롱당하는 두 명의 '민감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체감한다.

    이 장면들을 지켜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혜성은 결국 우리 자신의 불안을 비추는 거울이 아닐까. 우리가 외면하고 미뤄왔던 모든 문제들, 기후, 정치, 인간관계, 건강, 삶의 방향 같은 문제들이 돌덩이처럼 머리 위에 매달려 있고, 언젠가 반드시 떨어질 것이라는 공포. 하지만 그 사실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은 너무 어렵고 피곤해서, 우리는 차라리 고개를 돌리는 쪽을 선택한다. 그 선택이 결국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면서도 말이다.

    돈 룩 업은 혜성 이야기이기 전에, 현실을 직시하려는 사람과 현실을 피하는 사람들의 싸움에 가깝다. 그리고 그 싸움은 영화 속 이야기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주변에서 계속 벌어지고 있다. 누군가는 외치고,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분노하고, 누군가는 지쳐서 포기한다. 이 혼란의 중심에서 결국 살아남는 사람은, 끝까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2. 진실이 묻히는 사회: 주의력 경제 속에서 사라지는 경고의 목소리

    돈 룩 업을 보면서 가장 무거웠던 지점은 바로 이 장면이었다. 민디 박사와 디비아스키가 TV 생방송 스튜디오에 앉아 지구가 멸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차분하게 설명하는데, 그 바로 옆에서는 유명 연예인의 연애 스캔들이 떠들썩하게 다뤄지고 있었다. 화면은 둘 사이를 번갈아 비췄고, 진행자는 두 이야기를 같은 톤으로 가볍게 소비하려 했다. 그 순간 나는 내 일처럼 숨이 턱 막혔다. 중요한 이야기일수록, 사람들이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일수록 점점 더 가볍고 빨리 사라지는 콘텐츠가 되어버리는 현실을, 영화는 너무 정확하게 찔렀다.

    사실 나는 이 장면에서 무섭다기보다는 익숙함을 먼저 느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관심을 뺏기면 곧 존재도 잃는 시대다. 누군가의 고통이나 위기는 10초짜리 영상으로 잘려 나가고, 한때 세상을 들썩이게 했던 사건도 몇 시간만 지나면 다른 뉴스로 덮여버린다. 갈수록 진실은 무겁고 불편해진다. 반면에 자극적이고 화려한 뉴스들은 끝없이 소비된다. 알고리즘은 우리의 불안을 달래주지 않고, 오히려 즉각적인 쾌락과 웃음만 추천한다. 이 흐름 속에서 중요한 진실은 버티지 못한다.

    영화에서 민디 박사가 소셜 미디어의 스타로 급부상하는 장면이 있다. 그는 분명 지구 멸망을 경고하던 과학자였는데, 어느 순간 대중은 그의 과학적 메시지가 아니라 그의 외모와 사생활, 그리고 말투에 더 열광하기 시작한다. 나는 그 장면에서 현실과 영화가 어느 쪽이 먼저인지 혼란스러워질 정도였다. 얼마나 많은 전문가와 과학자, 정치인이 본래의 목적을 잃고 대중의 관심에 휩쓸려 모습을 변해갔던가. 그리고 나는 그 장면들을 보며 불편하게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었다. 나도 본질보다 외피에 더 빠르게 반응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영화는 '주의력 경제'라는 개념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사람들은 더 이상 진실을 기준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무엇이 흥미로운지, 무엇이 더 짧고 자극적인지, 무엇이 더 쉽게 웃음을 주는지를 기준으로 움직인다. 진실이 아무리 명백해도, 불편하거나 답답하면 그 진실은 금세 외면된다. 마치 시청률이 높은 연예인 이슈가 세상을 구할 것처럼 떠드는 뉴스처럼 말이다. 나는 이 점이 너무 현실적이라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은 디비아스키가 소셜 미디어에서 조롱받고 공격당하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단순히 "지구가 위험하다"라는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그녀의 표정, 말투, 과격한 톤을 문제 삼으며 비난을 쏟아냈다. 누군가는 그녀를 조롱했고, 누군가는 혜성이 가짜라고 주장했으며, 누군가는 음모론을 퍼뜨렸다. 중요한 건 그녀가 전달한 사실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녀의 존재를 어떻게 소비하고 싶은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이 장면에서 인간의 집단 심리가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실감했다.

    며칠 동안 피드에 뜨는 뉴스들을 보다 보면, 영화가 과장이 아니라 사실에 가까운 예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진짜 문제보다 가벼운 소재가 더 큰 관심을 받고, 누군가의 외모나 말버릇이 정책 논의보다 더 큰 화제가 된다. 분명 문제는 심각한데, 우리의 관심은 몇 초 만에 더 자극적인 곳으로 옮겨가 버린다. 이 시대의 뉴스 소비 방식은 파도처럼 빠르게 움직이는데,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는 건 진실이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든다. 혹시 우리 모두 스스로도 모르게 '진실을 외면하는 편'이 더 편하다고 느끼고 있는 건 아닐까. 불편한 이야기에 집중하면 마음이 복잡해지고, 무거운 자료를 읽자니 일상이 힘들어지고, 그래서 자꾸 밝고 가벼운 것만 찾게 된다. 나 역시 그런 부분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리고 영화 속 인물들이 혜성을 외면하는 모습이 단순히 멍청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본능적 회피심리 때문이라는 사실도 이해된다. 공포 앞에서 가장 먼저 무너지는 건 이성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계속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은 하나였다. 진실을 알고도 외면할 때, 결국 무너지는 것은 사회 전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관심을 두지 않고, 클릭하지 않고, 공유하지 않는 진실은 서서히 잊히고, 그 빈자리는 자극과 허무함이 채운다. 결국 세상은 조용히,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잘못된 방향으로 굴러가게 된다.

    돈 룩 업이 내게 준 가장 큰 깨달음은 이것이었다. 진실을 외면하는 것은 단순한 태도가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결정짓는 선택이라는 것. 그리고 그 선택은 종종 어처구니없을 만큼 가벼운 이유 때문에 이루어진다는 것.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뉴스를 소비하는 방식도, 타인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방식도, 중요한 문제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변화일지 몰라도, 적어도 더 이상 고개를 숙이고 웃으며 도망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장면들이 불편했던 이유는 단순히 현실을 닮았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바로 그 무관심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각은 꽤 아프지만, 동시에 앞으로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힌트를 주었다. 혜성이 오고 있는 것을 알면, 적어도 외면하지 말 것. 누군가가 절박하게 진실을 말할 때, 그 음성에 귀를 막지 말 것. 그리고 나 자신도 누군가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할 순간, 용기를 잃지 않을 것.

    3. 기술 낙관주의와 자본의 오만: 인간의 오판이 만들어낸 마지막 폭주

    돈 룩 업에서 가장 치밀하게 묘사된 인물은 대통령도, 과학자도 아니었다. 바로 IT 거물 피터 이셔웰이었다. 영화 속 그 인물은 실제 세상에서 이미 이름만 바뀌어 존재하고 있었다. 말투는 부드럽고, 미래를 예언하듯 말하며, 알고리즘과 AI를 마치 신처럼 추앙한다. 그는 혜성을 파괴하는 대신 그것을 ‘채굴’해 경제적 가치를 극대화하자는 계획을 내놓는다. 그 순간 나는 그의 행동이 황당하다기보다 너무나 익숙하다고 느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기술기업의 화려한 슬로건 뒤에 숨은 의도가 언제나 선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환경을 망치면서 ‘지속 가능성’을 외치고, 노동을 착취하면서 ‘혁신’을 말하고, 공공의 위험보다 주가 상승을 중요하게 여기던 많은 기업들이 떠올랐다. 영화 속 이셔웰 또한 그런 존재였다. 그는 인류의 생존보다 데이터와 예측 모델을 더 신뢰했고, 인간의 오판 가능성보다 자신의 알고리즘이 절대적이라고 믿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영화가 단순한 풍자를 넘어 현실의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고 느꼈다. 어릴 때는 기술이 세상을 구할 거라고 믿었다. 효율이 높아지고, 불편함이 줄어들고, 인간이 더 안전하고 여유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성인이 된 지금, 기술은 어떤 때는 해결사처럼 보이면서도 다른 때는 불안과 불평등을 더 키우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알고리즘이 소비 패턴을 예측해 주는 것보다 더 무서운 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그 알고리즘에 의해 조용히 길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셔웰이 혜성의 궤도를 조작하는 과정은 기술 오만함의 전형적인 패턴이다. 그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아니라, 데이터를 통해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문제를 ‘이용’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혜성이 가진 광물이 새로운 산업 혁명이 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현대 자본주의가 위험 앞에서도 어떻게 이익을 최우선으로 판단하는지 정확히 찔러낸다. 인류의 생존 가능성이 걸린 순간에도 그는 숫자와 데이터의 이득을 먼저 계산한다. 그리고 이런 인물에게 정책 결정권자들이 휘둘린다는 설정은 영화적 과장이 아니라 현실적 묘사에 가깝다.

    이 장면들을 보며 나는 꽤 오래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한때 나는 ‘큰 회사가 말하니까’, ‘유명한 전문가가 말하니까’ 당연히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리고 여러 실패와 혼란을 겪을수록 깨달았다. 거대한 힘과 거대한 기술은 종종 인간의 실수와 오류보다 더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을. 특히 그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이 ‘절대 자신이 틀릴 리 없다’고 믿는 순간부터 비극은 가속화된다. 영화 속 이셔웰은 이 위험을 그대로 체현한 인물이다.

    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거라는 믿음은 듣기에는 근사하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책임을 지우는 방식으로 작동할 때가 많다. 쓰레기 문제도, 기후 문제도, 사회적 분열도 결국 인간의 선택과 책임에서 비롯된 문제인데, 기술이 해결해 줄 거라고 믿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의 역할을 내려놓는다. 나는 이 영화가 기술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신처럼 떠받드는 태도, 그리고 그것을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권력 구조를 비판하고 있다고 느꼈다.

    특히 이셔웰이 민디 박사를 설득할 때 내뱉은 말들은 섬뜩할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그는 인간의 감정은 불완전하고 데이터는 항상 명확하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감정과 선택, 관계와 윤리가 만들어내는 복잡한 곳이다. 숫자와 그래프로 환원할 수 없는 인간의 삶을 기술이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은 결국 파국을 향한 확신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의 절정부에서 이셔웰의 계획이 실패로 드러나고, 혜성은 결국 지구를 향해 내려오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만든 예측 모델이 완벽하다고 믿었지만, 그 모델은 작은 변수 하나를 고려하지 못해 무너진다. 그 순간 나는 묘한 해방감과 동시에 씁쓸한 감정을 느꼈다. 세상을 멸망으로 몰아넣는 건 언제나 거대한 악이 아니라, ‘나는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에 사로잡힌 인간의 오만이라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장면에서 현실의 많은 일들이 겹쳐 보였다. 시장을 예측한 모델이 틀렸던 순간들, 전문가의 오판 하나가 국가 경제를 뒤흔들었던 순간들, 기술의 오류가 수많은 사람의 삶을 위험에 빠뜨렸던 사건들. 영화는 이 모든 사례를 모아 인류의 자만을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은 이것이었다. 기술은 결국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그릇만큼만 안전하고 윤리적이라는 것. 아무리 뛰어난 알고리즘도 인간의 탐욕과 결합하면 폭탄이 된다.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기술의 힘을 두려워하되, 인간의 욕망을 더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현실을 보며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건 아마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4. 개인적 감상: 마지막 순간의 조용한 용기와 내가 느낀 삶의 의미

    돈 룩 업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영화보다 현실이 더 허무하게 느껴졌다. 혜성이 하늘을 찢고 내려오는데도 정치인은 표 계산에 바쁘고, 언론은 선정적 뉴스에 몰두하며, 사람들은 가벼운 농담이나 밈을 공유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 장면들을 보는 내내 묘한 감정이 올라왔다. 웃기기도 한데, 웃고 있는 내가 불편했다. 영화 속 세계는 과장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의 한 조각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특히 ‘돈을 위해 진실을 외면하는 권력’, ‘재난보다 개인의 이익을 우선하는 기업’, ‘당장의 자극만을 원하는 대중’이라는 조합은 너무나 익숙했다. 뉴스 속에서 반복되는 기후 재난, 정치적 분열, 미디어의 자극적인 소비 구조가 떠올랐다. 심지어 나 자신도 때때로 피로하다는 이유로 중요한 문제를 외면해 왔다는 사실이 불편하게 스스로를 찔러왔다. 영화는 딱히 나를 비난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먼저 얼굴을 붉히게 되는 기이한 경험이었다.

    그런데도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나에게 이상한 평온을 줬다. 민디 박사와 그의 가족, 그리고 쿠퍼가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장면. 세상이 끝나는 순간에도 그들은 누가 옳았는지 따지지 않고, 소리치거나 울부짖지도 않았다. 테이블 위에는 따뜻한 음식이 놓여 있고,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며,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오늘 하루를 이야기한다. 혜성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오는 상황임에도 그 대화는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어쩌면 우리가 삶에서 끝까지 붙잡아야 할 건 거창한 진실도, 화려한 업적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결국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있어준 사람들과 나눈 평범한 대화와 시간, 그것이 가장 소중한 가치 아니었을까. 민디 박사는 세계가 자신을 조롱하고 왜곡할 때도, 마지막에는 결국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돌아왔다. 그는 과학자로서 실패했을지 모르지만, 인간으로서는 그 누구보다도 정직한 선택을 했다. 나는 그 장면에서 묵직한 위로를 받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쉽게 지치고 무력해지는 사람이다. 현실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마주하면 도망치고 싶고, 때로는 애써 무관심한 척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나에게 한 가지를 또렷하게 보여줬다. 진실을 해결할 힘이 없을 때라도, 최소한 외면하지 않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영화 속 사람들은 혜성을 보지 말자고 외쳤다. 불편한 진실을 보지 않는 것은 간단하고 편했다. 그러나 민디 박사는 끝까지 외면하지 않았고, 그것이 그가 인간으로서 지켜낸 마지막 존엄이었다. 나는 그 장면에서 ‘진실을 직시하는 일은 현실을 바꿀 힘이 없더라도, 적어도 나를 바로 세우는 힘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생각 이상으로 큰 위로였다.

    개인적으로 가장 울컥했던 순간은 쿠퍼가 마지막 식탁에서 말하는 한 문장이었다. 그는 세상이 끝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평소처럼 조용히 감사 인사를 전한다. 인간이란 존재가 가진 강인함이 무엇인지, 그 장면 하나에 모두 담겨 있었다. 극단적 공포 속에서도 서로의 존재를 붙잡는 그 태도는 내가 잊고 있던 삶의 본질을 되찾아주는 듯했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만약 내 삶에 혜성이 다가오고 있다면 나는 누구와 마지막을 함께 하고 싶을까?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사람들과 충분히 서로를 들여다보며 살고 있는가? 영화는 거창한 메시지를 던지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작은 질문을 던졌고, 그 질문이 오히려 더 깊게 마음속으로 침투했다.

    돈 룩 업은 재난 영화의 탈을 쓴 인간의 초상화 같다. 공포나 스릴보다 더 무서운 건, 우리가 얼마나 쉽게 진실을 외면하고, 얼마나 빠르게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는 존재인지 깨닫게 해 준다는 점이다.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강하고, 서로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도 알려준다는 점에서 따뜻한 영화이기도 했다.

    이 영화를 본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세계를 구하겠다는 거창한 책임감 따위는 가지고 싶지 않았다. 대신 나와 가까운 사람, 나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 나의 하루에 스며든 작은 관계들에 조금 더 솔직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거대한 혜성을 막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누군가의 마음을 지키는 일은 지금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돈 룩 업은 결국 영화 속 세계만을 비웃는 풍자가 아니라, 나 자신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오래 남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여전히 완전하지 않은 사람이고, 종종 진실을 외면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용기를 내서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을 것이라고, 영화는 아주 조용하게 말해주었다.

    5. 결론 및 총평 지금,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돌이켜보면 이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건 혜성 그 자체가 아니라, 혜성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였던 것 같다. 사실을 알고도 외면하는 순간, 재난은 더 이상 자연 현상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만들어 버린 결과가 된다.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고 서로의 자리를 지켜주던 식탁의 사람들처럼, 혼란 속에서도 우리가 어떤 태도를 선택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세상은 언제든 어긋나고 흔들릴 수 있지만, 진실을 향해 시선을 들고 서로에게 기대는 마음만은 끝까지 지킬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돈 룩 업은 결국 조용히 묻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