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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소설이 어떻게 한국 영화의 걸작이 되었나

    2016년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를 처음 봤을 때, 원작이 영국 소설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일제강점기 배경이 너무 자연스러웠거든요. 나중에 알고 보니 사라 워터스(Sarah Waters)라는 영국 작가가 2002년에 쓴 '핑거스미스(Fingersmith)'라는 소설이 원작이었습니다.

    원작 소설을 읽고 영화를 다시 보니까, 박찬욱 감독이 단순히 번역한 게 아니라 완전히 재창조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배경만 바뀐 게 아니에요. 캐릭터 성격, 이야기 전개 방식, 결말까지 많은 부분이 달라졌습니다. 오늘은 원작 소설과 영화의 차이를 5가지로 정리해봤습니다.

    1. 배경 변화 - 빅토리아 시대 런던에서 일제강점기 조선으로

    원작 핑거스미스는 1860년대 빅토리아 시대 영국이 배경입니다. 주인공 수전(Sue)은 런던 빈민가 도둑 소굴에서 자란 소매치기예요. 모드(Maud)는 시골 저택에 사는 고아 상속녀입니다. 전형적인 영국 계급 사회 이야기죠.

    박찬욱 감독은 이걸 1930년대 일제강점기 조선으로 옮겼습니다. 숙희는 조선인 사기꾼이고, 히데코는 일본 귀족 아가씨입니다. 단순한 배경 변경처럼 보이지만, 이게 이야기 전체 분위기를 바꿔놓았어요. 영국의 계급 갈등이 한국에서는 민족 갈등으로 바뀌었습니다.

    배경 변화가 가져온 정치적 의미

    원작에서 수전과 모드의 관계는 계급 차이 때문에 복잡해집니다. 가난한 소매치기와 부유한 상속녀라는 신분 격차가 핵심이에요. 하지만 영화에서 숙희와 히데코는 조선인과 일본인이라는 민족 차이를 안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라는 배경 덕분에 영화는 원작보다 훨씬 정치적입니다. 식민지 조선인의 설움, 친일파의 위선, 일본 문화에 대한 양가감정까지 담겨있어요. 원작이 개인적인 사기극과 사랑 이야기였다면, 영화는 역사적 맥락 안에서 펼쳐지는 저항의 이야기가 됐습니다.

    2. 삼촌 캐릭터의 변화 - 가장 큰 차이점

    원작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는 삼촌 캐릭터입니다. 원작에서 크리스토퍼 릴리(Christopher Lilly)는 모드의 삼촌이자 후견인인데, 그냥 돈에 집착하는 냉혹한 수집가예요. 희귀본 책을 모으는 게 취미이고, 모드를 통제하긴 하지만 영화만큼 극단적이진 않습니다.

    영화 속 고즈에이(조진웅 분)는 완전히 다릅니다. 책 수집가인 건 같지만, 하는 짓이 소름 끼쳐요. 히데코를 이용해서 돈을 버는 방식이 정말 끔찍합니다. 자세히 말하면 스포일러지만, 관객들이 가장 충격받는 부분이 바로 삼촌의 비밀입니다.

    왜 박찬욱 감독은 이렇게 바꿨을까

    박찬욱 감독은 인터뷰에서 "원작보다 더 강렬한 억압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이라는 배경에서 히데코가 겪는 억압은 단순히 경제적인 게 아니에요. 정신적, 육체적으로 완전히 통제당하는 상황입니다.

    이 변화 덕분에 히데코의 탈출이 더욱 절실해집니다. 원작 모드는 그저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영화 속 히데코는 생존을 위해 탈출해야 합니다. 이 차이가 영화를 훨씬 긴박하게 만들었어요.

    3. 성적 묘사의 차이 - 원작보다 과감한 영화

    원작 핑거스미스도 두 여자 주인공의 사랑을 다룹니다. 하지만 2002년 소설이라 그런지 묘사가 절제되어 있어요. 감정선에 집중하고, 신체적 관계는 암시 정도로만 나옵니다. 빅토리아 시대 배경이라 더욱 조심스럽게 다뤄졌고요.

    박찬욱 감독은 정반대로 갔습니다. 영화는 19금 등급을 받았고, 두 주인공의 관계를 매우 직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처음 영화 봤을 때 깜짝 놀랐어요. 한국 영화에서 이 정도까지 보여줄 줄 몰랐거든요.

    단순한 자극이 아닌 서사적 필연

    많은 분들이 "왜 이렇게 노골적으로 찍었냐"고 물어봅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어요. 근데 영화를 다시 보니까 이해가 됐습니다. 이 장면들이 단순히 자극적이려고 넣은 게 아니에요.

    히데코는 평생 남성들의 시선 속에서 살았습니다. 삼촌이 주최하는 독서회에서 외설적인 책을 낭독하면서요. 그런 히데코가 처음으로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는 과정이 바로 숙희와의 관계입니다. 원작에서는 글로만 설명되던 이 변화를, 박찬욱 감독은 화면으로 보여주기로 한 거예요.

    4. 서술 구조의 변화 - 2부에서 3부로

    원작 소설은 2부 구성입니다. 1부는 수전 시점, 2부는 모드 시점으로 같은 사건을 두 번 보여줍니다. 독자는 1부에서 수전 편에 서서 모드를 순진한 희생양으로 봤다가, 2부에서 모드의 진짜 계획을 알고 충격받습니다.

    영화는 3부 구성으로 바꿨습니다. 1부 숙희 시점, 2부 히데코 시점까지는 원작과 비슷한데, 3부에서 두 사람이 함께 탈출하는 과정을 추가했어요. 이게 정말 중요한 변화입니다.

    3부 추가로 얻은 것

    원작은 2부에서 끝나기 때문에 독자들이 스스로 결말을 상상해야 합니다. "그래서 둘이 어떻게 됐을까?" 하는 궁금증을 남긴 채 소설이 끝나요. 열린 결말이라고 할 수 있죠.

    박찬욱 감독은 3부를 만들어서 확실한 결말을 보여줬습니다. 숙희와 히데코가 어떻게 삼촌과 후지와라를 이기고 함께 떠나는지, 그 과정이 속 시원하게 나옵니다. 복수와 해피엔딩을 동시에 원하는 관객들의 욕구를 정확히 맞춘 거예요.

    개인적으로는 영화의 3부 구성이 더 만족스러웠습니다. 원작의 열린 결말도 좋지만, 영화처럼 명확한 결말이 있으니까 후련했어요.

    5. 결말의 차이 - 복수의 온도

    원작과 영화 모두 반전이 있고 주인공들이 승리하지만, 그 방식이 다릅니다. 원작에서 수전과 모드는 비교적 조용히 도망칩니다. 릴리 삼촌은 정신병원에 갇히고, 사기꾼 젠틀맨은 교수형을 당하지만, 주인공들이 직접 복수하진 않아요.

    영화는 훨씬 통쾌합니다. 숙희와 히데코가 고즈에이와 후지와라에게 직접 복수합니다. 특히 후지와라의 최후는 정말 강렬해요. 관객들이 박수 치고 싶어질 정도로 속 시원한 복수 장면입니다.

    한국 관객을 위한 카타르시스

    박찬욱 감독은 한국 관객의 정서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권선징악을 좋아하잖아요. 나쁜 놈은 벌받고, 착한 사람은 행복해지는 걸 보고 싶어 합니다. 원작의 애매한 결말보다는 확실한 복수와 해피엔딩이 한국 관객한테 더 잘 맞아요.

    일제강점기 배경이라는 것도 복수의 의미를 더해줍니다. 히데코와 숙희의 승리는 단순히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억압받던 조선인들의 상징적 복수처럼 느껴집니다. 이런 층위를 원작에는 없었어요.

    원작 소설도 읽어볼 만할까요

    영화를 먼저 본 분들이 많이 물어보시는데, 저는 원작도 꼭 읽어보라고 추천합니다. 영화랑 다른 재미가 있거든요. 특히 빅토리아 시대 런던 빈민가 묘사가 정말 생생합니다. 사라 워터스는 역사 소설 전문 작가라서 시대 고증이 탄탄해요.

    번역본도 잘 나와 있습니다. '핑거스미스'라는 제목으로 검색하면 찾을 수 있어요. 다만 원작은 영화보다 훨씬 느립니다. 러닝타임 145분 영화와 달리, 소설은 600페이지가 넘거든요. 천천히 읽는 맛이 있어요.

    원작을 먼저 읽고 영화를 봐도 재밌을까

    반대로 원작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는 것도 추천합니다. 박찬욱 감독이 어떻게 각색했는지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하거든요. "아, 이 장면을 이렇게 바꿨구나" 하면서 감탄하게 됩니다.

    특히 캐릭터 변화를 보는 게 흥미로워요. 원작 모드는 차갑고 계산적인데, 영화 속 히데코는 외로움과 분노를 함께 가진 복합적인 캐릭터예요. 김민희 연기 덕분에 히데코가 원작보다 훨씬 입체적으로 느껴집니다.

    각색의 성공 사례로 기억되는 이유

    원작을 영화로 만들 때 가장 어려운 게 뭘까요. 원작 팬들을 만족시키면서도 새로운 관객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너무 원작에 충실하면 재미없고, 너무 바꾸면 팬들이 화냅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 균형을 완벽하게 맞췄습니다. 원작의 핵심(반전, 두 여자의 사랑, 계급 갈등)은 유지하면서도, 한국적 배경과 영화적 긴장감을 더했어요. 덕분에 원작 팬들도 만족하고, 원작을 모르는 관객들도 충분히 즐길 수 있었습니다.

    칸 영화제와 해외 평가

    아가씨는 2016년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됐습니다. 비록 황금종려상은 못 받았지만, 해외 언론과 평론가들의 평가는 뜨거웠어요. 특히 원작이 영국 소설이라는 점 때문에 서구권 관객들이 더 흥미로워했습니다.

    "영국 소설을 일본 제국주의 시대 조선으로 옮긴 게 천재적"이라는 평이 많았어요. 문화적 번역을 넘어선 재창조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국제적 명성을 한 단계 더 높인 작품이죠.

    어떤 순서로 보면 좋을까요

    영화를 먼저 볼지, 원작을 먼저 읽을지 고민되시는 분들께 제 경험을 공유합니다. 저는 영화를 먼저 봤는데, 이게 정답이었던 것 같아요. 영화가 워낙 강렬해서 먼저 충격을 받고, 나중에 원작으로 빈틈을 채우는 식이었거든요.

    만약 원작을 먼저 읽으면 영화의 반전이 덜 놀랍겠죠. 대신 각색의 묘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둘 다 장단점이 있으니 취향껏 선택하시면 됩니다.

    두 번째 감상 추천

    영화든 원작이든, 한 번 보고 끝내지 마세요. 아가씨는 두 번 봐야 제대로 이해됩니다. 첫 번째는 반전에 놀라면서 보고, 두 번째는 복선을 찾으면서 보는 거예요.

    특히 1부에 깔린 복선들이 어마어마합니다. 히데코의 표정 하나, 숙희의 말투 하나에도 다 의미가 있어요. 두 번째 볼 때 "아, 여기서 벌써 힌트를 줬구나" 하면서 감탄하게 됩니다.

    결론: 원작을 넘어선 영화

    개인적으로 아가씨는 원작을 뛰어넘은 몇 안 되는 영화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핑거스미스도 훌륭한 소설이지만, 박찬욱 감독이 일제강점기 조선이라는 배경으로 옮기면서 완전히 새로운 작품으로 거듭났어요.

    원작의 계급 갈등이 민족 갈등으로 바뀌면서 정치적 의미가 더해졌고, 삼촌 캐릭터의 변화로 히데코의 탈출이 더욱 절박해졌습니다. 3부 구성 추가로 확실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했고, 과감한 영상미로 국제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각색이란 게 이런 겁니다. 원작을 존중하되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새로운 시대와 문화에 맞게 재해석하는 것. 박찬욱 감독은 이걸 완벽하게 해냈습니다.

    아직 안 보신 분들은 영화부터 보세요. 그리고 여유가 되면 원작 소설도 읽어보세요. 두 작품을 비교하는 재미가 정말 쏠쏠합니다. 이미 본 분들은 다시 한번 보시길 추천합니다. 두 번째 볼 때 진짜 재미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