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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내 삐삐가 울리던 고딩 시절... 우리가 몰랐던 '언니'들의 진짜 전쟁

    1995년, 내 교복 주머니 속 삐삐가 울리던 시절...
    우리가 몰랐던 '언니'들의 진짜 이야기

    제가 79년생이라 1995년엔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쉬는 시간마다 공중전화 앞으로 달려가 삐삐 음성 사서함을 확인하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컴백홈'에 열광하던 때였죠.
    그때 지하철에서 정장을 빼입고 출근하던 '커리어우먼' 언니들은 제 눈엔 그저 멋진 어른처럼만 보였습니다.
    하지만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보며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그 화려했던 90년대의 공기 속에서, 우리 언니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진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해 사투를 벌였는지를요.
    영화는 1995년,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단어가 대한민국을 지배하던 시절의 대기업 사무실을 비춥니다. 입사 8년 차지만 고졸이라는 이유로 여전히 커피를 타고 구두를 닦는 자영(고아성), 유나(이솜), 보람(박혜수)이 그 주인공입니다. 회사는 이들에게 토익 600점을 넘기면 '대리'로 승진시켜주겠다는 달콤한 미끼를 던집니다. 단순히 월급 조금 더 받고 이름표를 바꾸고 싶었던 이들의 소박한 소망은, 회사의 거대 비리인 폐수 유출 사건을 마주하며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폭주하기 시작합니다.
    "아이 캔 두 잇", 서툰 발음 뒤에 숨겨진 단단한 용기
    영화 속 세 친구는 당시 우리 주변에 실존했을 법한 인물들입니다. 성실하지만 투명인간 취급받던 자영, 화려한 스타일 뒤에 냉소적인 시선을 감춘 유나, 그리고 수학 천재지만 숫자에 상처받은 보람. 이들이 "마이 앤트 이즈 인 코리아" 같은 서툰 영어 문장을 외우며 비리를 추적하는 장면은 지독하게 사실적이면서도 뭉클합니다. 저는 이들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사랑과 정의라는 거창한 말보다 더 무서운 힘은, 내 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누르고 '이건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연대라는 것을요.
    영화가 구현한 95년의 풍경은 79년생인 저에게 소름 돋는 향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브라운관 모니터의 떨림, 사무실 가득했던 담배 연기, 그리고 팩스가 들어올 때 나던 기계음까지. 이 디테일들은 단순한 고증을 넘어 당시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던 '노동의 현장'을 그대로 복원해 냅니다. 특히 토익 수업을 듣기 위해 새벽같이 모여든 고졸 사원들의 모습은, 당시 한국 사회가 외치던 '세계화'라는 구호가 사실은 얼마나 많은 차별의 벽을 숨기고 있었는지 예리하게 분석하게 만듭니다.

    내가 사회로 나가기 직전, 언니들이 닦아놓은 길

    영화 속 자영이 상사들의 구두를 닦으며 미소 짓는 장면을 보는데, 문득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사회에 나갔을 때의 모습이 겹쳐 보였습니다. 저는 79년생이라 IMF 직후의 찬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사회 생활을 시작했지요. 그때 제가 누렸던 최소한의 권리들이 사실은 영화 속 자영이나 유나 같은 인생 선배 언니들이 온몸으로 부딪히며 만들어낸 균열 덕분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데 왜 그렇게까지 해?"라는 질문에 "우리가 이 일을 제일 잘하니까요"라고 답하던 그녀들의 모습에서, 제가 잃어버렸던 직업적 자존감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이제는 어느덧 조직의 중견이 된 저의 모습도 돌아보게 됩니다. 저는 과연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옳은 일을 위해 내 기득권을 걸 수 있는 용기가 남아 있을까요? 얼마 남지 않은 저의 커리어 속에서 제가 지켜야 할 것은 높은 직함이 아니라, 1995년 그 뜨거웠던 여름에 언니들이 보여주었던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그 순수한 진심이라는 것을 이 영화를 통해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제 아이가 제 젊은 날의 사진을 보며 "아빠는 어떤 세상을 살았어?"라고 물을 때, 부끄럽지 않게 대답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배우들이 완성한 90년대의 공기와 연대
    고아성, 이솜, 박혜수 세 배우의 시너지는 이 영화의 가장 큰 보석이었다라고 생각합니다. 고아성은 특유의 담백함으로 관객을 95년의 사무실 한복판으로 이끌고, 이솜은 그 시절 커리어우먼의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구현해 냈습니다. 특히 박혜수가 보여준 소심하지만 단단한 천재의 모습은 극의 리듬을 절묘하게 잡아주었습니다. 이들이 옥상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서로를 다독이는 장면은, 가족보다 더 진한 동료애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미장센이었습니다.
    이종필 감독은 실화(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이를 무겁기만 한 사회 고발극이 아닌 경쾌하고 힘 있는 '언니들의 성장담'으로 풀어냈습니다. 이는 단순한 권선징악을 넘어,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말단들의 전문성'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79년생인 제가 보기에 이 영화는 90년대에 대한 가장 세련되고 따뜻한 표현이라고 느꼈습니다.

    영화를 보고 동년배 친구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

    1. 실제 90년대 사무실 풍경과 비슷한가요?

    네, 놀라울 정도로 비슷합니다. 여직원들이 유니폼을 입고 책상을 닦거나 커피를 타는 모습은 당시의 보편적인 풍경이었죠. 영화는 그 불편한 현실을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그 속에서 피어난 인간적인 유대를 정직하게 담아냈습니다.

    2. 제목이 왜 '영어토익반' 인가요?

    당시 '토익'은 단순한 점수가 아니라, 학벌이라는 거대한 벽을 넘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의 사다리'였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영어를 배우는 행위를 넘어,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에 당당하게 내기 위한 '언어적 해방'의 과정으로 묘사하고 있어 큰 울림을 줍니다.

    3. 지금 우리 세대에게 이 영화는 어떤 의미일까요?

    79년생인 우리에게 이 영화는 '기억의 복원'입니다. 우리가 사회로 나가기 전, 누군가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이렇게 싸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죠. 지치고 무기력해진 40대 직장인들에게 "Tiny drops make an ocean(작은 물방울이 모여 바다를 이룬다)"이라는 이 영화의 메시지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나의 인생 평점: ★★★★☆ (4.7/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