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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담보 리뷰: 9살 아이를 돈 대신 받아왔다. 진짜 가족의 의미

    9살 아이를 돈 대신 받아왔다.
    진짜 가족의 의미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저녁이었습니다. 창밖을 보며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다 우연히 다시 보게 된 영화 담보.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땐 그저 눈물 쏙 빼는 신파라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고 부모님의 야윈 등을 마주하는 지금은 그 의미가 전혀 다르게 다가오더군요.
    영화의 시작은 지독하리만큼 비정합니다. 1993년 부산, 거친 사채업자 두석(성동일)은 빌려준 돈을 받으러 갔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은 엄마에게서 9살 승이를 '담보'로 빼앗아옵니다.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이 잔인한 출발선에서, 관객들은 불편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 불편한 관계를 아주 서서히, 그리고 끈질기게 인간적인 온기로 덮어버립니다. 처음엔 짐 덩어리였던 아이가 어느새 두 남자의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이유가 되어가는 과정은, 우리가 잊고 살았던 가족의 본질을 뼈저리게 분석하게 만듭니다.
    계산기를 두드리던 손이 아이의 신발 끈을 묶을 때
    사채업자인 두석에게 인생은 오직 원금과 이자로만 설명되는 산수였습니다. 하지만 승이의 맑은 눈망울과 마주하면서 그의 계산기는 고장 나버립니다. 아이의 학비를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넣고, 행여 상처받을까 노심초사하며 학교 앞을 서성이는 그의 모습은 부성애가 핏줄의 전유물이 아님을 증명합니다. 저는 두석이 승이를 되찾기 위해 어둠의 구렁텅이로 망설임 없이 뛰어드는 장면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사랑이란 결국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대가 없이 내어주는 지독한 진심이라는 것을요.
    90년대 특유의 아날로그 풍경들도 마음을 울립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게 해결되는 시대엔 느낄 수 없는 '기다림의 무게'가 영화 곳곳에 배어 있습니다. 삐삐가 울리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아이의 목소리 하나에 세상을 다 얻은 듯 미소 짓는 두석의 표정은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듭니다. 사진첩 속에 한 장 한 장 쌓여가는 승이의 성장 기록은 혈연보다 무서운 것이 함께 보낸 시간의 힘임을 보여주는 완벽한 미장센이었습니다.

    부모님의 뒷모습에서 마주한 나의 부끄러운 자화상

    영화 속 두석의 굽은 등을 보는데 자꾸만 저의 부모님이 겹쳐 보였습니다. 자식인 저를 남들보다 조금 더 높은 곳으로 올려보내기 위해, 당신들은 세상이라는 차가운 일터에 자신의 청춘과 꿈을 통째로 담보 잡히고 사셨던 것은 아닐까요? 두석이 승이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기꺼이 갈아 넣었듯이, 우리 부모님에게도 자식이라는 존재는 당신들의 모든 고통을 잊게 해줄 유일한 '보물'이었을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 무릎이 아프다며 웃으시는 부모님을 뵐 때마다, 이제는 제가 그분들의 든든한 담보가 되어드려야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얼마 남지 않은 부모님의 시간 속에서, 제가 갚아야 할 이자는 돈이 아니라 더 자주 손을 잡아드리고 체온을 나누는 일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가르쳐 주었습니다. 승이가 성인이 되어 기억을 잃어가는 두석을 찾아내 '아빠'라고 부르던 그 절규는, 저에게도 뒤늦은 효도의 참회처럼 들려 한참을 소리 내어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시에 두려움도 엄습했습니다. 훗날 내가 더 나이 들어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었을 때, 나의 아이들도 나를 영화 속 승이처럼 따뜻하게 기억해 줄 수 있을까? 인간은 누구나 늙고 병들지만, 누군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주었던 기억만 있다면 그 삶은 헛되지 않다는 것을 영화는 묵직하게 전하고 있었습니다.

    배우들이 빚어낸 삶의 냄새와 눈물
    성동일이라는 배우가 왜 한국 영화의 보물인지 이 작품은 여실히 증명합니다. 화려한 수식어 없이도 "그래, 사는 게 다 그렇지"라고 말하는 듯한 그의 투박한 연기는 영화에 지독한 사실성을 부여합니다. 특히 승이만을 기억하려 애쓰며 무너져가는 그의 눈빛은 억지 눈물을 짜내는 신파를 넘어선 인간적인 고결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김희원 배우와의 찰떡같은 호흡은 자칫 무거울 수 있는 극의 분위기를 유머러스하게 환기하며 관객을 웃기고 울립니다.
    아역 박소이의 발견은 이 영화의 축복입니다. 맑은 눈동자에 눈물이 고이는 순간, 관객의 모든 논리적인 방어 기제는 무너져 내립니다. 아이의 순수함이 거친 어른들의 세계를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영화는 가족이란 운명이 점지해주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빚어가는 것임을 완벽하게 설득해 냅니다. 성인 역의 하지원 배우 역시 과거의 감정선을 차분하게 받아내며 마지막 엔딩의 감동을 묵직하게 완성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혼자 조용히 되뇌어 본 질문들

    1. 이 영화는 단순한 신파인가요?

    누군가는 뻔한 눈물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진심이 담긴 눈물은 결코 식상하지 않습니다. 육체적인 이별이 있더라도 서로의 마음이 온전히 연결되었다는 안도감을 주는 엔딩은, 이 차가운 세상을 버티게 하는 아주 뜨거운 위로였습니다.

    2. 왜 제목이 '담보'여야 했을까요?

    가장 비인간적인 경제 용어인 '담보'가, 영화가 끝날 즈음엔 서로의 생을 온전히 책임진다는 가장 숭고한 약속의 의미로 치환됩니다. 단어의 온도 변화를 통해 감독은 우리가 잊고 살았던 가족의 정의를 묻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3. 지금 시대에도 이런 이야기가 유효할까요?

    오히려 파편화되고 개인화된 지금의 사회에서 더 큰 울림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핏줄 중심의 고정관념을 깨고, 함께 살며 밥을 나누는 정이 얼마나 무서운 힘을 가졌는지 일깨워주는 이 영화는 가족의 새로운 얼굴을 마주하게 하며, 각박한 세상에서 우리가 기댈 곳은 결국 '진심'뿐이라는 사실을 따뜻하게 위로하듯 건네줍니다.

    나의 인생 평점: ★★★★☆ (4.8/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