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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라, 늘 그랬듯이.
낯선 땅에 뿌리 내린 할머니의 보따리와 우리 엄마들의 위대한 생존기
"윤여정, 연기가 아닌 삶의 냄새를 풍기다"
우리 엄마의 보따리가 나를 키웠음을 이제야 압니다
영화 속 순자가 한국에서 가져온 보따리를 푸는 장면을 보는데, 자꾸만 저의 부모님이 겹쳐 보여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79년생인 제가 이만큼 자라기까지, 우리 부모님 역시 자신들만의 '아칸소 들판'에서 사셨던 것은 아닐까요? 자식의 입에 들어가는 밥 한 숟가락을 위해, 당신들은 세상이라는 거친 풍랑 속에서 자신의 꿈과 자존심을 통째로 보따리에 싸서 구석에 밀어두고 사셨을 것입니다. 나는 순식간에 자라 어른이 되었지만, 부모님의 세월은 나를 지탱해 주느라 이미 하얗게 새어버린 뒷모습을 보며 목이 메어왔습니다.
나이가 들어 세상의 비정함에 조금씩 익숙해진 저의 모습도 돌아보게 됩니다. 저는 과연 영화 속 순자처럼, 내 삶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타인을 향해 "미나리는 원더풀하단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있는 사람일까요? 90년대의 낭만이 사라진 지금, 이제는 생존과 책임을 걱정해야 하는 차가운 현실만 남았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저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가족이란 완벽한 성공을 나누는 사이가 아니라, 가장 초라한 밑바닥에서도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다시 뿌리 내릴 준비를 하는 동지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인간은 결국 유한한 시간을 살지만, 윤여정 배우님이 보여준 그 '쿨한' 저항 정신과 사랑이라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 비로소 영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훗날 제 아이에게 "엄마가 힘들 때마다 너라는 미나리가 내 곁에서 푸르게 자라줘서 버틸 수 있었단다"라고 당당하게 말해줄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제이콥이 냇가에 무성히 자란 미나리를 보며 "할머니가 자리를 참 잘 잡으셨네"라고 말할 때, 그것은 부모 세대의 희생이 마침내 자식 세대의 구원이 되었음을 알리는 가장 눈부신 선언처럼 느껴졌습니다.
배우들의 눈빛이 완성한 경이로운 가족 초상화
영화 관람 후 가슴 속에 남았던 질문들
1. 왜 제목이 '미나리' 인가요?
'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라며 물을 깨끗하게 만드는 식물입니다. 이는 낯선 환경에서도 적응하고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이민자 가족의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동시에 부모 세대의 희생이 다음 세대를 위한 '정화'의 과정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2. 윤여정 배우가 맡은 순자는 왜 전형적인 할머니가 아닌가요?
감독은 할머니를 단순히 자애로운 존재로 그리기보다, 한 인간으로서의 개성을 가진 인물로 설정했습니다. 이는 할머니 역시 꿈과 취향이 있는 주체적인 인간임을 보여주며, 그녀의 사랑이 '희생'을 넘어선 '선택'임을 강조하는 장치입니다.
3. 마지막 화재 장면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제이콥이 공들여 쌓아온 '물질적 성공(창고)'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불길 속에서 가족은 서로를 구하며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파괴를 통한 가족 공동체의 재탄생을 의미합니다.
4. 폴(Paul)이라는 캐릭터는 왜 등장하나요?
광신도처럼 보이지만 순수한 신념을 가진 폴은, 세속적인 성공에 집착하는 제이콥과 대비되는 인물입니다. 비이성적으로 보일지라도 무언가를 온전히 믿는 마음이 삶을 지탱하는 또 다른 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5. 영화의 엔딩은 해피엔딩인가요?
A. 모든 것을 잃은 듯 보이지만, 냇가에 무성히 자란 미나리를 발견하며 끝이 납니다. 이는 인위적인 노력보다 자연스러운 생명력과 가족의 사랑이 결국 승리할 것임을 암시하는, 아주 희망적인 결말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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