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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리 엄마가, 할머니가 이런 일을 당했다면 어떨까요? 저는 이 질문을 영화가 끝나고 한참 동안 놓지 못했습니다. 소파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멍하니 앉아서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그 생각만 했어요.
영화 〈정순〉은 정지혜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2022년에 개봉한 독립 영화입니다. 60대 여성 정순이 디지털 성범죄 피해를 당하고, 그 이후 일상이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다큐멘터리처럼 담담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에요. 화려한 연출도 없고, 극적인 반전도 없습니다. 대신 그 담담함이 오히려 가슴을 더 깊게 파고듭니다.
평범한 하루가 지옥이 되는 속도
정순은 식품 공장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평범한 60대 여성입니다. 동료들과 점심을 먹고, 퇴근 후에는 딸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일상의 전부예요. 늦깎이로 배운 스마트폰이 정순에게는 새로운 세상으로 통하는 창이었습니다. 그 스마트폰을 통해 한 남성과 알게 됐고, 서로 사진을 주고받았어요.
여기까지 읽으시면서 혹시 "왜 그런 사진을 찍었어" 같은 생각이 드셨나요? 솔직히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그 생각이 들었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어요.
사진이 인터넷에 유출된 후 벌어지는 일들은 너무 빠릅니다. 공장 동료들 사이에 소문이 퍼지고,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지고, 정순은 밥을 먹으면서도 수저를 제대로 들지 못합니다. 감독은 이 과정을 과장 없이 보여줘요. 울부짖는 장면도, 복수를 다짐하는 장면도 없습니다. 그냥 조용히 무너지는 한 사람의 일상이 화면에 담길 뿐이에요. 그래서 더 잔인하게 느껴졌습니다.
범인보다 주변이 더 무섭다
이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인 건 성범죄 자체가 아닙니다. 정순을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이 진짜 공포였어요. 직장 동료들은 대놓고 수군거리고, 일부는 정순을 피하기 시작합니다. "그 나이에 왜 그런 짓을 했대"라는 식의 시선이죠.
가장 마음이 아팠던 건 딸의 반응입니다. 딸은 엄마의 고통보다 자기 결혼에 방해가 될까를 먼저 걱정합니다. 피해자인 엄마 앞에서요. 물론 딸도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만, 그 장면에서 저는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도 공감이 이렇게 어려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한동안 멍했습니다.
결국 정순은 스스로 직장을 떠납니다. 범인이 아니라 피해자가 쫓겨나는 거예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더 이상 그 시선들을 견딜 수 없어서 자기 발로 나가는 겁니다. 이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폭력적인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마트폰 하나로 달라진 세상,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
정순 세대는 스마트폰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카카오톡 글씨 크기를 최대로 키워놓고, 전화 받는 것도 더듬거리는 분들이 많잖아요. 디지털 세상의 위험성에 대한 교육을 받을 기회도 없었고, 사진 한 장이 인터넷을 통해 어디까지 퍼질 수 있는지 상상조차 못 하는 세대입니다.
그런데 이걸 개인의 실수로만 볼 수 있을까요? 디지털 기기를 보급하면서 그에 따르는 안전 교육은 전혀 하지 않은 사회의 책임은 없는 걸까요? 영화는 이 질문을 직접적으로 던지지는 않지만, 정순의 서투른 스마트폰 사용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히 답을 내리고 있습니다.
김정순 배우의 연기에 대해서
주연 김정순 배우는 연극 무대에서 활동해온 배우로, 정지혜 감독의 단편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 영화에서 김정순 배우의 연기는 "연기"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습니다. 공장에서 일하는 모습, 밥을 먹는 모습, 길을 걷는 모습 하나하나가 연기가 아니라 실제 생활을 보는 것 같아요.
특히 피해 사실이 알려진 후 직장에서 점심을 먹는 장면이 잊히지 않습니다. 숟가락을 들고 있는데 손이 미세하게 떨려요. 대사도 없고, 음악도 없습니다. 그 떨림 하나로 정순이 지금 얼마나 무너져 있는지가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달라진 것
저도 뉴스에서 비슷한 사건을 접하면 무의식적으로 피해자의 행동을 먼저 판단하곤 했습니다. "왜 그랬대?", "조심하지 그랬어" 같은 반응이요. 이 영화는 그 반응 자체가 또 다른 폭력이라는 걸 알려줬습니다.
노년층의 디지털 범죄 피해, 피해자를 향한 사회적 편견, 2차 가해라는 더 큰 폭력. 이 세 가지 주제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꼭 한번 보시길 바랍니다.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는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보고 나면 누군가를 바라보는 시선이 분명 달라질 거예요. 적어도 저는 그랬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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